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로마노바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가 승하하고 장남 표도르 3세가 차르에 올랐지만 자식을 남기지 못 하고 죽자, 미워하던 새엄마의 자식 표트르 1세가 차르에 오르는 것을 반대해 [[스트렐치]]들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켰다. 이는 [[이반 5세]]와 표트르 1세가 공동차르에 오르면서 소피야가 [[섭정]]을 맡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. 섭정이 되어 국정을 돌보다 [[나선정벌]]이 일어나 1687년 봄에 [[청나라]]에서 병력 7천을 파견해 알바진을 공격할 때 사신을 베이징에 파견해 협상을 제안했는데, [[강희제]]가 수락하면서 [[네르친스크 조약]]이 맺어져 공격은 9월은 중지되었다. 1689년에는 [[오스만 제국]]과 청나라에 패한 것을 구실로 봉기한 [[표트르 1세]]에 의해 모반죄로 체포되어 [[노보데비치 수도원]]에 갇혔고, 1698년에 소피야를 복권시키려는 반란이 있었지만 진압되고 소피야는 계속 수녀원에서 살게 되었다. 이후로 소피야를 더욱 엄격히 감시하여 사실상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. 수녀들조차 부활절 예배를 제외하고는 소피야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. 6년이 지나 1704년에 사망했다.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432px-Sofiarepin.jpg]] 러시아의 大화가 [[일리야 레핀]]이 1879년에 그린 '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유폐된 소피야 공주'. 소피야 공주는 권력을 잃고 몰락한 사람답게 매우 심란한 표정을 하고 있고 창 밖에는 소피야를 복위시키려는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교수형을 당한 [[스트렐치]]들의 시신이 보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